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58년 작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Books

로버트 A. 하이라인이라는 이름은 SF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한번은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화성에는 그의 이름이 붙은 크레이터가 있으며 95년 발견된 소행성도 하이라인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하이라인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스타십 트루퍼스>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만 책은 언젠가 한번 읽어봐야 할텐데 하는 마음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Have Space Suit-Will Travel)>은 1958년 출간한 SF 소설로, 고등학생 킵이 달 여행을 위해 응모한 비누광고 이벤트에서 아차상인 우주복을 받으며 시작합니다. 일반인에게는 필요도 없을 우주복이기에 돈으로 바꿔준다는 제안마저 들어왔지만, 킵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우주복을 입고 우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부품을 자력으로 만들어 더하고 수선합니다. 결국 대학 입학금 마련을 위해 킵은 우주복을 팔아야 한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주복을 입고 산책을 나선 어느 날 밤, 그는 뒤뜰에서 우주해적에게 납치되어 달로 끌려갑니다. 우주해적선에서 만난 천재소녀 피위 그리고 그의 우주복 오스카와 함께 달, 명왕성, 베가, 소마젤란 성운까지 생존과 지구의 운명을 건 우주여행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58년에 출간된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주복 하나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주인공이 우주복을 입고 달을 걸으며 구시렁구시렁거리는 킵의 모습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나는 바로 주인공 킵 때문입니다. 이전 다른 소설 리뷰에서도 몇 번 호소한적이 있습니다만 서양소설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본능에 충실한 동물같은 느낌이라 영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영웅적인 행동도 이성이 아닌 본능이 시키는대로 행동한 결과인 경우가 많다고 보이기에 마냥 좋아할 수 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킵은 그들에 비해 매우 이성적이고, 겸손합니다.
그와 동시에 어린 여자애한테 얼간이 취급할 기회를 줬다는 생각에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피위는 전에도 우주복을 사용해봤다. 나는 겨우 흉내나 내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잘난 체하며 거들먹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피위, 네가 아는 정보를 모두 알려줘. 나는 초보잖아."
별것 아닌 겸손의 모습입니다만 이 정도의 겸손도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물론 킵 역시 앞에서 언급했던 전형적인 모습, 쉽게 욱하고 감정적인 판단이 많은 모습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비교적 심하지도 않고 일부 성급해보이는 언행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몇몇 의견들과는 달리 비열하게 생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영웅처럼 죽는 게 나은 법이다. 죽는다는 게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긴 하지만, 비열하게 살아남더라도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다. 게다가 죽을 때까지 자기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해명해야만 한다. 영웅적인 역할을 해야 할 때마다, 내가 중얼거리는 이 주문이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비열한 사람이 되는 건 그보다도 더 끌리지 않았다.
...(중략)
나는 피위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겠지만, 범죄자들을 위해서는 흘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조크와 나눴던 대화가 그립긴 했지만, 그런 인간을 태어날 때 없애버릴 방법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사형집행인으로서의 내 책임을 다하겠다. 팀에게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그 두 배다.
그들이 괴물들의 수프가 되어 생명을 마감했다면, 솔직히 별로 유감스럽지 않다. 설령 내일 내 순서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수프가 됨으로써 평생 가장 착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본 작품의 또 한명의 주인공인 피위는 말도 안될 정도로 똑똑하지만 감성적으로는 너무나도 어린애라 읽는 도중 짜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그런 그녀를 잘 다루는 킵이기 때문에 더욱 그가 대단해보이고 공감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피위와 그녀의 아버지는 킵보고 '피위보다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만 아마도 사실이겠지요. 킵이 피위보다 잘나지 못한 이유는 작중에서 킵의 아버지가 한탄했듯이 그 동네 교육이 문제였을 겁니다. 아버지의 조언으로 교육과정을 바꾸자마자 엄청난 공돌이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 보아도 킵이 비범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가정교육이 잘되서 성품까지 올바르니 일등신랑감이죠. 국비지원으로 MIT까지 들어갔으니 미래까지 탄탄할 듯 합니다.

등장인물도 매력적이지만 글 자체가 정말 큰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존 스칼지 소설의 재치있는 글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작품 역시 동일한 재미를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구 너비가 2도라는 건 알지?
"그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알았어."
"그러시겠지. 함께 달리기 시합을 하려면 먼저 출발하도록 배려해줘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저런 말을 어떻게 생각해 낼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를 맛깔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비유와 인용이 등장하여 사전지식이 없으면 공감하기 힘들 수 있지만 친절하게도 국내 출판본은 많은 주석을 달아줘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마젤란 성운에서 벌어진 재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일단 벌레머리에 대한 반론을 킵과 피위가 제시하지 않은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인간을 단순히 가축취급하는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반론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문명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는 진화한 생물인 인간을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것을 묵과한다면, 이는 인간의 역사를 보았을 때 원주민을 인간 취급하지 않고 도륙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인류는 이제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고 있으니 고도 문명을 가진 외계인도 이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벌레머리 재판에 이어 진행되는 인류에 대한 재판도 이상합니다. '위협이 될 싹을 자른다'라니, 그렇다면 현재 그들의 그룹에 속한 종족 외에는 조금이라도 진화의 싹을 가지고 있다면 존재하는 순간 사라져야 합니다. 물론 엄마생물처럼 본성이 착한 종족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행성 하나를 시공간에서 분리해서 파멸시킬 정도의 문명을 가진 이들이 이렇게 좁쌀만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우습군요. 차라리 문명에 개입해서 원하는대로 개조하는 것이 이득이 클 것 같은데, 외계인도 귀찮은 것일까요?


이처럼 재판 부분은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만족합니다. 명성만 듣고 앞뒤 안보고 구매할 수 있는 하이라인의 책은 모두 사두었습니다만 후회 없을 듯 합니다. 앞으로 읽을 책들도 무척 기대되네요.

작중에는 인용하고 싶은 주옥같은 글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지구를 빈민가라고 표현한 부분이 마음에 드네요. 인상깊었던 부분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칩니다.
우리가 있는 이 지역은 일종의 빈민가에요. 뒤떨어지고 아주 거친 동네죠. 가끔 그녀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도 해야만 해요. 엄마는 좋은 경찰이지만, 누군가는 불쾌한 일도 처리해야 하니까요. 그녀는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
"얘야, '진짜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말은 항상 의심해보는 게 좋아. 네가 그러려는 동기를 분석해봐."
"하지만 500달러면 거의 한 학기 수업료잖아요."
"이건 그거랑 아무 상관 없어.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찾아서 그걸 해.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을 너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 다시 생각해봐."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
킵, '행운'은 꼼꼼하게 준비했을 때만 따라오는 거야. '불운'은 일을 대충 처리했을 때 따라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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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16/06/21 00:12 # 답글

    흠, 시험보고 나서 읽어 봐야 겠군요. ^^
  • LionHeart 2016/06/21 19:27 #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SF 소설이었습니다. :)
  • 지나가던과객 2016/06/22 00:11 # 삭제 답글

    프라이데이에서는 주인공의 성행위 장면을 주인공이 소속된 조직에서 대놓고 방영하고,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에서는 가족혼이라는 독특한 혼인방법이 등장하고, 여름으로 가는 문에서는 키잡까지 정말 비범한 작가분이시죠.
  • LionHeart 2016/06/22 13:07 #

    기대하지 않았던 방향으로도 비범하신 작가님이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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