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메리의 리본: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묘사 Books

1991년 야마모토 슈고로상, 1993년 일본모험소설협회대상 최우수단편상 수상, 1994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3위, 를 수상한 작가 이나미 이쓰라 님의 작품입니다. 본 책은 작가님께서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은 후에 쓴 5개의 작품을 모아 출판한 것이며 '남자의 선물'을 공통된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묘사였습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마치 영화를 보고 있다고 착각할만큼 배경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눈 앞의 풀숲에서 무언가가 홱 튀어나왔다. 시든 풀과 똑같은 색깔의 산토끼가 도망쳤다. 여자가 쓰던 퍼프같이 하얀 꼬리를,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총을 뽑아 자세를 가다듬고 있다는 걸 깨닫고, 혼자서 쓴웃음을 흘렸다.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나는 토끼에게 말했다. 도망칠 필요 없단다. 나는 무얼 쫓는 사람이 아니야. 나 자신이 쫓기는 몸이거든.
바람이 높다란 우듬지를 지나는지, 달구어진 바늘 같은 붉은 솔잎이 떨어져 내렸다. 초겨울 무렵에 잠깐 내리다 멎는 비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자 잡목림 사이로 쨍하니 말갛게 갠 겨울의 푸른 하늘이 보였다. 멧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려온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 흐르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14p에 있는 초반부의 글을 옮겨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정갈함이 느껴질 정도로 정돈된 묘사와 문장은 저를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 세계로 안내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문장이 그려나가는 이야기 또한 무척 매력적입니다. 멋진 성인 남자의 듬직한 외양 속에서 이따금 표현되는 따스함을 그리는 다섯 가지 에피소드는 책 소개에 빠지지 않는 '하드보일드'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게 만듭니다. 각 에피소드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와 감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닥불
추적자에게 쫓기던 남자가 숲 속에서 만난 노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나이 차이가 나는 두 남자는 각자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딘가 영혼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합니다. 둘의 만남은 매우 짧았지만 어떤 이들이었는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점과 도망치며 묘사된 숲의 정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나미가와의 요새
포토그래퍼인 주인공이 취재지에서 우연히 2차 세계대전의 철도병이라 주장하는 소년과 노파를 만나게 되고, 그들에 의해 이미 지나가버린 1945년 8월 14일의 사건을 겪게 된다는 판타지입니다.
다른 이야기와 달리 가장 판타지 색이 짙은 이야기입니다. 노파와의 대화와 주인공의 삶에서는 현실의 냄새가 강하게 나면서도 소년이 지키는 토치카에서는 과거로 돌아간 듯한 환상적인 느낌이 매력적입니다. 본 책에 있는 에피소드 중 가장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목적(꿈)을 이루기 위해 동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리밭 미션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항공대의 군인이자 BF-17F 폭격기의 파일럿인 제임스가 부하를 살리기 위하여, 아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하여 수행하는 보리밭 미션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국의 보리밭과 전쟁터에서의 긴박함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며, 듬직하고 강인한 아버지이자 군인인 제임스에게 '멋진 남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매력적입니다.

종착역
과거 일본 도쿄역에서 승객의 짐을 열차에서 차량으로 날라주고 돈을 받는 직업 아카보를 하는 두 사람이 꿈을 위해 야쿠자의 돈을 슬쩍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아카보라는 직업과 도쿄역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만 읽고 있으면 주인공 두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강한 동경심과 이를 참고 살아가는 인내력을 모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인트 메리의 리본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아주는 '사냥개 탐정'을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에게 야쿠자로부터 지인의 맹도견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숲 속에서 살아가는 총을 지니고 개를 파트너 삼아 살아가는 강한 남자라고 하니 이전 리뷰했던 '탄착점'의 주인공이 떠오릅니다. 실제로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추리소설 주인공인 필립 말로의 오마주라는 것 같습니다. '사냥개 탐정'이라는 독특한 직업의 설정도 재미있었고, 야쿠자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골탕을 먹여 내쫓아버리는 담대한 모습과 눈을 잃은 소녀들을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하나미가와의 요새'와 '세인트 메리의 리본'을 제외한 에피소드들은 오픈엔딩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오픈엔딩을 좋아하지 않는 저였지만 흥미롭게 읽던 중에 이야기가 끝나버려도 이 작품은 어딘가 설득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뒤는 굳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남자다운 것이다', '이 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라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겨우 한 권을 읽었는데도 작가 이나미 이쓰라님의 글에 푹 빠지게 된 것 같습니다.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세인트 메리의 리본'의 이야기는 '사냥개 탐정'이라는 책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무척 기대됩니다.

작가님께서 1994년 63세에 암으로 작고하셨기에 더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작중에는 '한국', '한국 여성'도 종종 등장하기에 한국과 어떤 관계가 있으셨는지도 궁금하네요. 국내에는 본 책과 함께 '사냥개 탐정'만이 출판되었지만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출판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게 해준 '하우미 컬렉션' 기획자 및 출판사 '손안의 책'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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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onHeart's Blog : 사냥개 탐정: 더이상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류몬 다쿠 2017-03-29 00:02:56 #

    ... 이 책은 작가 이나미 이쓰라의 사후 단편들 엮어 출판된 유고작 입니다. 서로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단편집이었던 '세인트 메리의 리본'과 달리 지난 단편 주인공 중 하나인 사냥개를 찾는 탐정 류몬 다쿠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만난 4건의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파트너이자 사냥개인 '조' ... more

덧글

  • 시엘 2017/02/18 19:52 # 삭제 답글

    이 소설 재밌죠. 그 다음 작품인 <사냥개 탐정>도 무척 좋아합니다.
    캐릭터도 좋고, 글도 정말 좋아서, 2권 밖에 없는 게 정말 아쉽더군요.
  • LionHeart 2017/02/20 10:24 #

    저도 '사냥개 탐정'을 카트에 넣어두고 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다음 이야기도 무척 기대되는군요. :)
    작가님께서 돌아가셔서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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