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유고시집 Books

얼마전 교보문고 할인행사가 있어서 고전 포켓북 시리즈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집어왔습니다. 그 중에는 본 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윤동주 유고시집이 있었는데요. 어렸을 적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 말고는 윤동주 님의 글을 읽는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교양이 부족하여 시를 제대로 즐기는 주제가 못되기에, 첫 인상이 강했던 몇 편만 옮겨두고자 합니다.
서시(序時)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랜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

산협의 오후

내 노래는 오히려
섦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은
아- 졸려.

//

화원에 꽃이 핀다 中

나는 세계관, 인생관, 이런 점도 큰 문제보다 바람과 구름과 햇빛과 나무와 우정, 이런 것들에 더 많이 괴로워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 말이 나의 역설이나, 나 자신을 흐리는 데 지날 뿐일까요. 일반은 현대 학생 도덕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승을 섬길 줄을 모른다고들 합니다. 옳은 말씀들입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하나 이 결함을 괴로워하는 우리들 어깨에 지워 광야로 내쫓아 버려야 하나요, 우리들의 아픈 데를 알아주는 스승, 우리들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세계가 있다면 박탈된 도덕일지언정 기울여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겠습니다. 온정의 거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손목을 붙잡고 목놓아 울겠습니다.
...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코스모스가 홀홀이 떨어지는 날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단풍의 세계가 있고 - 이상이견빙지(履霜而堅氷至) -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각오하라가 아니라,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믿습니다.
노변(爐邊)에서 많은 일이 이뤄질 것입니다.

//

종시(終始) 中

늙은이 얼굴이란 너무 오래 세파에 찌들어서 문제도 안 되겠거니와 그 젊은이들 낯짝이란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열이면 열이 다 우수(憂愁) 그것이요, 백이면 백이 다 비참 그것이다. 이들에게 웃음이란 가뭄에 콩싹이다. 필경 귀여우리라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의 얼굴이란 너무나 창백하다. 혹시 숙제를 못해서 선생한테 꾸지람 들을 것이 걱정인지 풀이 죽어 쭈그러뜨린 것이 활기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내 상도 필연코 그 꼴일 텐데 내 눈으로 그 꼴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듯 그렇게 자주 내 얼굴을 대한다고 할 것 같으면 벌써 요사(夭死)하였을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기로 하고 단념하자!
차라리 성벽 위에 펼친 하늘을 쳐다보는 편이 더 통쾌하다.
...
이제 나는 곧 종시를 바꿔야 한다. 하나 내 차에도 신경행, 북경행, 남경행을 달고 싶다. 세계일주행이라고 달고 싶다. 아니 그보다도 진정한 내 고향이 있다면 고향행을 달겠다. 도착해야 할 시대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다.

덧글

  • 불멸자Immorter 2017/02/08 00:53 # 답글

    서시와 별 헤는 밤은 기억나네요 ㅎㅎ
  • LionHeart 2017/02/08 11:04 #

    저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알고 있던 글은 그 두 편이었습니다.^^
  • blue snow 2017/02/11 00:42 # 답글

    저도 이거 두권 샀는데 ㅎㅎ
    다른시도 좋은데 못자는밤도 좋더라구요.

    하나 둘 셋 넷
    ..........
    밤은 많기도 하다.

    이런 짧은 시요~
    기형도 김경주 작가의 시집도
    좋아요 추천합니다~ : )
  • LionHeart 2017/02/11 10:33 #

    아 '보내야 할 밤'이 너무 많다고 하던 그 시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저도 고민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생각나서 기억에 남았던 시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 밖에 단순히 자연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묘사를 한 것 같은 시들도 있는데 그것도 좋더군요.
    교양이 부족해서 시를 잘 읽지 못하는 저도 윤동주 시집은 인상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천하신 시집도 염두해두었다 기회되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괴인 怪人 2017/02/11 08:29 # 답글

    이번에 도서관에 신청한 필사초판본이군요
  • LionHeart 2017/02/11 10:34 #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작은 포켓북 사이즈라 들고다니기도 편한데 표지까지 이뻐서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
  • 시엘 2017/02/18 19:53 # 삭제 답글

    안 그래도 이 책 사고 싶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는 시도 외웠는데, 다시 시집도 많이 읽어봐야겠어요.
  • LionHeart 2017/02/20 10:23 #

    저도 정말 간만에 읽은 시집이었습니다.
    시를 잘 읽지 않는 저도 인상깊게 읽은 만큼, 시엘님께서는 더 좋은 책이 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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