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모형: 사건도 재미있지만 대화도 재미있는 작품 Books

사이카와&모에 시리즈 9번째 이야기입니다. 지난 '지금은 더 이상 없다'에서 모에가 뜬 동시에 사이카와의 활약이 줄었으니 다시 활약할 날을 기대한다고 하였는데 그 바람이 바로 이루어졌군요.
모형 교환회 행사장인 공회당에서 여성 모델의 사체가 발견된다. 사체는 목이 절단되어 있었고, 발견된 방은 밀실 상태. 같은 밀실 안에는 모형 마니아 데리바야시 고지가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기절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동일한 시기 M공대에서 벌어진 여자 대학원생 밀실 살인사건의 용의자이기도 하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 이 사건은 재미있는 것이 용의자가 범인이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도 그가 범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때문에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증거라도 나오지 않는 한은 범인으로 재판에서도 풀려나지 않을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수록 쉽게 범인을 찾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음에도 등장인물들이 뛰어다니며 새로운 정보를 구하고, 새로운 의심을 만들어 독자를 현혹시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번에 모에는 대부분 삽질과 억측만하고 문제풀이는 사이카와가 맡았습니다. 게다가 모에가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위험에 빠지고, 사이카와는 가장 많이 다쳐가며 그녀를 구했습니다. 허참...이 아가씨는 정말 성장이라는 것을 모르는군요. 아니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긴 한 것 같은데, 아직도 한참 더 커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성장함으로써 잃는 개성도 있겠지만, 전 주위에 폐를 끼치는 행동만은 두둔해주기가 힘들더군요. 사이카와 교수가 정말 고생하는 것 같습니다.

사이카와 교수가 모에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 아가씨를 누가 말리나요...사이카와 교수는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는 하지 않을 것 같으니, 아마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빠르게 판단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번 적당히 하라고 언질을 줘도 바뀌기는 커녕 심각해지기까지 하니 말이죠. 혼나야 될 사람은 모에와 모에의 팬을 자처하는 경찰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살인사건도 좋았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왜 남자들은 모형 만들기를 좋아할까?" 모에는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동기가 뭘까?"
"진짜는 살 수가 없으니까." 가네코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르바이트해서 진짜를 살 수 있게 되면 더 이상 프라모델 따윈 만들지 않지."
"다시 말해 대용품이라는 거지?"
"모형이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기원을 더듬어보면 하니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까...전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근데 공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엔 어엿한 성인도 있었고, 진짜를 살 수 있는 부자들도 있었을 거야. 그런데 모형에 푹 빠져 있었어."
"어른이 돼도 전차는 살 수 없고 전투기를 탈 수도 없어. 여전히 우주에는 갈 수 없고, 목숨 바쳐 싸우는 것도 사양하고 싶고 말이야.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중간한 여자밖에 사귈 수가 없지."
"여자 얘기는 뭐하러 해?" 요코가 참견했다.
"그런 뜻이 아냐. 그런 거 있잖아.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프라모델 같은 거 말이야."
...
"맞아. 그런 건 가네코가 말한 대용품과는 방향성이 조금 다른 것 같아." 모에가 말했다.
"아마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된 거겠지." 가네코가 말했다. "그런 교환이 이루어졌을 뿐이야. 하이힐을 이상하리만치 좋아하는 녀석도 있잖아."
...
"그런 교환은 이미 일상다반사잖아. 텔레비전 광고를 좀 봐. 담배 광고에는 반드시 미녀가 등장해. 술 광고에는 뜬금없이 산속 풍경이 나와. 자동차만 나오는 자동차 광고 따윈 없다고."
...
"아, 그래도 여자들은 어른이 되면 어렸을 적 놀이를 그만두잖아. 남자들은 어째서 그걸 계속하는 걸까?" 모에는 다이고보나 기타를 떠올렸다.
"사회적인 압박 때문 아닐까?" 요코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으며 살아서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남자들은 자기가 돈을 번다는 자부심이 같은 게 있잖아. 그래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어. 오만한 행동이지. 지금껏 여자들한테는 본질적으로 놀이가 허락되지 않았는 걸."
...
"그럼 여자들은 사회에 나가 자립하면 어른이 돼서도 인형놀이 같은 걸 할까?" 모에가 물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질문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는 않지." 요코가 말했다. "애당초 여자애들 놀이는 그 자체가 사회에서 강요받은 거야. 한정되고 좁은 미래의 상을 보여주는 모형인걸. 여자는 어른이 돼도 집 안에서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규칙의 모형 말이야. 소꿉놀이도, 인형놀이도 그렇잔아."
"아아, 그렇게 옳은 말을 하다니 다시 봤어." 가네코가 말했다.
"전부, 모략이었다는 뜻." 요코는 익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네." 모에도 수긍했다.
"맞아. 그러니가 여자애한테는 나처럼 건담을 조립하게끔 놔두는게 정답이야."
이번 사건의 소재로서 모형, 프라모델, 피규어, 코스튬플레이가 나오다보니 '어째서 남자는 어른이 되어도 로봇을 만들고, 여자들은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사이카와 교수 연구실의 연구생들 대화가 재미있었습니다.

모든 말에 공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모형을 만든지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만 지금도 종종 하고 싶어서 재료 가격을 알아보거나 작업 영상을 유튜브로 찾아보곤 합니다. 하지만 목적은 굳이 말하자면 완성했을 때의 달성감에 있는 것 같거든요. 설계대로 가이드한 대로 만들었을 때도 그렇고 자신만의 어레인지가 들어가면 또 그것은 그것대로 좋습니다. 어찌되었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완성되었을 때의 느낌만 생각하면 손이 근질근질해지고 작업 중이라면 더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더군요. 이런 마음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후반부에 여자아이들의 놀이는 '모략'이었다라는 말도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확실히 사회가 놀이를 강제했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굳이 여자아이들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남자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면 계집애같다고 혼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축구나 밖에서 몸으로 하는 놀이를 잘하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어른들에게서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전혀 생각치 않던 부분이었기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남녀 불문하고 키덜트니 코스튬플레이니, 게임이니, 성인이 되어도 아니 성인만 즐길 수 있는 놀이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네코, 미안해. 구니에다 조교님, 면목 없습니다. 사이카와 교수님도...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전부 제 책임입니다." 모에는 연구실 가운데에서 고개를 숙였다.
...
"내가 잘못했어." 가네코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그만둬. 서로 자기 탓 하는 거. 화해 같은 건 안 하는 게 이득이야. 이제 두 번 다시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 구니에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이 부분에서는 구니에다 조교의 말이 인상깊었네요. 다시 싸울 일이 없어지니까 화해하지 말라는 주장은 늘 듣던 충고와는 반대였기에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은 이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친한 친구일 수록 더욱 적용되는 말 같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화해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관계가 깨지지 않을 정도로 긴밀한 사이라거나, 아니면 끊임없이 토론하며 서로의 능력을 높여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통증이 몰려들기까지 하루가 더 걸릴지도 모른다. 인체는 실로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어렸을 적에는 과격한 운동을 하면 그날 중에 통증이 느껴졌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이 반응이 느리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기능이 성장한 건가? 몸과 정신을 속이는 이 기능은 아마도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최후이자 최대의 쇼크에 대비한 것이리라. 이런 관점으로 보니 인생 후반주의 3분의 2는 죽기 위한 준비를 하고자 사는 듯하다. 하루의 3분의 2를 만찬을 차리는 데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인이 그러하듯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역시 이 3분의 3 법칙을 따르고 있다고 사이카와는 생각한다.
아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고귀한 기만을 '성숙'이라 부르는 것이겠지.
썩어가는 과육과 똑같다.
최근들어 몸소 느끼고 있는 부분이라서 더욱 깊게 음미할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는 살인사건 풀이도 흥미롭지만, 글 자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습니다. 지난 '여름의 레플리카'는 모에의 친구가, '환혹의 죽음과 용도'는 사이카와 연구실의 하마나카 후카시가 등장했던 반면, 이번 이야기에서는 마키노 요코와 가네코가 활약했습니다. 주변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좋네요.

이제 다음 권 '유한과 극소의 빵'으로 이 시리즈도 끝입니다. 어떤 이야기로 막을 내릴지 무척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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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무명 2017/03/01 11:27 # 답글

    이 시리즈는 정통 추리물로 보면 좀 미묘한 점이 많고 등장인물들의 말빨 보는게 재밌죠
    사이카와의 어머니가 히로인(...)으로 나오는 V시리즈도 정발됐으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 LionHeart 2017/03/01 20:18 #

    오호, 책날개를 통해 V 시리즈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이카와 어머니'가 히로인이라는 것은 처음 알게된 정보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말씀하신대로 V 시리즈도 꼭 국내 정식 발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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